본문 바로가기

일상활동

고구마 농사꾼과 쌀빵

조선일보에 기고했던 에세이입니다.(11월21일 게재)
참고로 보시라고 실어 봅니다.
**********************

        <고구마 농사꾼과 쌀빵>

농업관련 인터넷 사이트를 가면 어디든지 눈에 띄는 닉네임이 하나 있다. '여름지기'. 내 블로그에도 단골이다. 이분은 충남 서천에서 고구마 농사를 짓는데 전량 인터넷으로 판매한다. 어떻게 입소문을 내는지 고구마가 자라기도 전에 캐달라는 분이 많아 난감할 정도란다. 활동하는 카페만도 30여개. 지난 여름에 열린 충남농업인정보화대회에서는 홈페이지 부문 대상을 받았다.

열혈 여름지기님이 요즘 쌀빵과 열애 중이다. 행사만 열렸다 하면 쌀빵을 잔뜩 가져와 무조건 먹어보란다. 7월 충남농업인정보화대회에서도, 9월 서천에서 열린 주말 현장간담회에도 색색의 예쁜 쌀빵이 등장했다. 서천엔 까칠한 사춘기 자녀들까지 도우미로 동원했다. 고구마농장 주인이 웬 쌀빵? 어느 날 그 이유를 담은 이메일이 날아왔다.

여름지기님은 맨손으로 귀농해 고구마 농사를 지은 지 13년. 갖은 노력 끝에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고구마가 건강식으로 인기를 더해가니 너도나도 고구마 농사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은 마음에 차별화로 경쟁력을 키울 방법을 찾았다고 한다. 그런데 남의 땅을 빌려 하는 농사라 새로운 농법을 도입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대안은 가공산업뿐이라 생각하고 정한 것이 쌀빵. 3년 전의 일이란다.

적자생존―.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생물이나 집단이 살아남는다. 환경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천천히 변하느냐 빨리 변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여름지기님은 고구마 농가가 수요 이상으로 늘어난다는 것을 알고는 미리 준비에 나섰다. 임차농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을 찾아, 험난하지만 미래가 보이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우리 농어업을 둘러싼 환경은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 세계화로 인한 시장개방은 급속도로 진행되고 농어업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도 예전 같지 않다. 농업기술의 발달로 생산성은 날로 높아지는데 입맛은 야속하게도 거꾸로 간다. 사방에서 끊임없이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은 급박하게, 어떤 것은 아주 천천히….

일러스트=정인성 기자 1008is@chosun.com

사람은 본능적으로 변화에 대해 두려움이 있다. 보이지 않는 것,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불안 때문일 것이다. 나중엔 좋을지 몰라도 당장 불편하고 고단하면 피하고 싶어한다. 본능이다. 새로운 시도나 변화 앞에 주춤거리고, 때론 반발을 하는 이유다. 고친다는 의미의 개혁이란 말은 그래서 무겁게 느껴진다.

농어촌 개혁가―.필자도 지난 3월부터 농어업 현장에 들어가 농어업인의 입장에서 그들을 위해 일해보자는 의미로 넥타이를 풀고 점퍼를 입었다. 그러나 혹시 폼으로 보였을까, 허세로 보였을까. 장관이 개혁가가 되려 한다면 세상이 뭐라 할까. 괜히 튀어보려고 하지나 말라고? 나의 두려움은 어디쯤에 있을까. 나를 쌀빵 여름지기님만큼 알아주긴 할까.

인연(因緣)―.뭔가를 이루려면 인과 연이 닿아야 한다. 둘 중 하나만 있어도 힘들다. 인은 인간의 노력을 뜻하고 연은 상황이 따라줘야 한다는 뜻이다. 연을 운(運)이라고도 한다. 사람에게 운이 있듯이 정책과 제도에도 운이 있다. 탄생하는 데도 운이 있어야 하고 성공하는 데도 운이 따라야 한다. 운은 세상이 원하는 것이다.

세상이 원하도록 하기 위해, 그래서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설득해야 한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입장과 생각들이 있다. 어느 것 하나 같은 것이 없다. 열 사람 열 가지 생각, 백 사람 백 가지 생각이다. 마치 같은 산에서 자라는 나무라 해도 잎이 넓은 것이 있고, 가느다란 것이 있는 것처럼.

우리 농어업 현장도 마찬가지다. 현장에는 정말 많은 입장과 생각들이 있다. 쌀 문제만 해도 쌀 농가의 입장이 있고, 조합장의 입장이 있고, 농민단체의 입장이 있다. 농수협 개혁, 농어업 선진화, R&D 개편 등에도 수많은 입장과 생각들이 있다. 나는 지금 각양각색의 그것들을 잘 살피고 있는가. 혹시 너무 의욕만 앞선 나머지 그들을 서로 충돌하고 덧나게 한 것은 아닌가.

바위를 쉽게 깨려면 결을 찾아 내리쳐야 한다고 들었다. 세상을 설득하는 일도 맥을 잘 잡는 일과 이치가 같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게 말처럼 쉬울까. 수많은 입장과 생각들이 낳은 각기 다른 이해는 조정만으론 근본적인 해결이 어렵다. 그것들을 통하는 맥을 찾아야 한다. 맥을 찾는 것은 지혜를 모으는 일이다. 다행히 농어업 현장에는 보석 같은 지혜가 지천이다. 경험에서 우러난 살아있는 지혜다. 그것을 모으기 위해 나는 주말마다 길을 나선다.

이스라엘은 물이 부족하다고 한다. 그래서 강우량의 95%를 사용하고 농업에서 면적당 생산성만큼 물 사용량당 생산성도 중요하게 여긴다. 1950년부터 60년을 노력한 결과 물 생산성을 5배로 높였다.

우린 땅이 좁다. 땅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우리 식의 개혁이다. 우리가 가진 자원과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나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나는 한마리 곤충이다. 허물을 벗고 탈바꿈을 하고 싶다. 상황이 바뀌면 거기에 적응하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지금의 모양을 바꿔나가야 한다.

그렇지만….정녕 나 자신부터 개혁은 됐는가. 말로만 개혁이고, 겉모습만 개혁인 것은 아닌가. 점퍼 차림도 또 다른 가증스러움은 아닌가. 도대체 나는 지금까지 고구마 대신 내 몫의 '쌀빵'을 적절히 준비해왔는가.